솔론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업적 3가지와 우드로 윌슨
솔론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7현인 중 한 명인 솔론(Solon, 기원전 658년경~560년)은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아테네의 정부 시스템을 개혁하여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를 이끌어낸 인물이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솔론은 살라미스섬의 통치권을 두고 라이벌 도시 국가인 메가라에 대항해 성공적인 군사작전을 펼친 장군으로 먼저 명성을 얻었다. 고대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솔론은 기원전 594년에 입법자로 선출됐다고 한다.
엄한 법 개정과 시민 권력 확대
솔론이 취임했을 당시 정부체제는 대부분 이전의 입법자인 드라코의 유산으로 이뤄졌었다. 엄격한 것으로 유명했던 드라코의 법은 심지어 나태함이나 과수원에서 과일을 훔치는 경범죄에도 사형을 선고했다. 솔론은 형벌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법률을 개정했고, 귀족보다 시민에게 더 많은 정치적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도시의 정부체제를개혁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모든 아테네인이 마치 정부에 지분을 가진 것처럼 느끼게 만듦으로써 에우노미아(Eunomia,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시민이면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합법화했고, 모든 시민이 배심원이 될 수 있게 했으며, 민주 의회의 전신 격인 사백의회라는 대의기관을 만들었다.
지중해 여행과 개혁의 폐지
2년의 임기가 끝난 후 솔론은 아테네를 떠나 10년 동안 지중해를 여행하고 다녔다. 사실 그는 그가 제정한 법률을 폐지해달라는 아테네인의 요청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아테네를 떠난 것이었다. 말년에 아테네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이룬 개혁 중 다수가 폐지됐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넌더리를 쳤다.
민주화 초석과 아테네의 번영
비록 몇 년 동안 지속됐을 뿐이지만 솔론의 개혁은 그리스 입헌제도가 민주화의 첫발을 내딛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솔론이 사망하고 한참이 지난 후인 기원전 508년에 클레이스테네스라는 이름의 아테네 귀족이 도시를 통치하게 되면서 솔론의 법을 기반으로 한 민주적인 정부체제를 갖췄고 아테네의 문화와 철학, 군사력에 유례없는 번영을 이끌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년~1951년)은 1889년 오스트리아 빈의 유복한 가정에서태어났다.
비트겐슈타인의 생애
고틀로프 프레게(1848년~1925년)의 조언에 따라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해 버트런드 러셀(1872년~1970년)에게 수학 기초 이론을 배웠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군에 입대했다. 그때 전쟁터 참호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전쟁 포로수용소에서 쓴 것이 그의 첫 저서 《논리철학 논고》(1921년)이다.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 비트겐슈타인은 영국으로 돌아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면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저서《철학 탐구》(1953년)의 원고를 썼다. 책은 그가 사망한 후에 출판되었다.
언어와 논리 철학
비트겐슈타인의 첫 저서 《논리철학 논고》는 번호를 매긴 명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언어에 특정한 논리적 구조가 있고, 이 구조는 세상의 구조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에서 말하는 것과 명제가 보여주는 것을 구분했다. 명제는 세상의 구조가 어떻다고 말하지만 그 구조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은 명제들의 구조를 통해서이다. 논리란 명제의 구조에 관한 것이다. 논리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지만 언어와 세상의 구조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은 오로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려는 잘못된 시도에서 대부분의 철학 문제가 생겨났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철학자들이 논리를 통해 세상의 구조가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하기보다 세상이 특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려고 할 때 문제에 부딪친다고 주장했다.
언어게임과 철학
《철학 탐구》에서는 철학이 왜 잘못 이해되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대한 혼동에서 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언어를 비표준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거나 다양한 언어 사용 방식이 있음을 무시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는 “철학이란 언어라는 무기를 이용해 우리 머릿속에 걸린 마법과 싸우는 전투이다.”라고 썼다. 그래서 그는 언어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는 것이 핵심인철학의 치료적 개념을 지지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으로 선출된 대학 교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년~1924년)은 세상사에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포용함으로써 미국의 외교 정책을 변화시킨 인물이다. 월슨의 두 번째 임기 중에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동참해서 최초로 전투 부대를 유럽으로 파견했는데, 이는 미국이 강대국으로 발전하게 된 주요 사건이었다.
윌슨의 성장 과정과 정치 입문
장로교 목사의 아들인 윌슨은 버지니아주 스톤튼에서 태어났으며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1886년에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고 1890년에 프린스턴대학교로 돌아왔다.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던 그는 1902년에 프린스턴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10년에는 정계에 발을 들였고, 민주당원으로 뉴저지 주지사에 선출되었다. 윌슨은 1912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되었으며 세 명의 후보가 경쟁하는 대통령 선거에서, 재임 중이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1916년에는 재선에 성공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국제연맹 창설 추진
윌슨은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초반에는 미국의 오랜 중립 정책을 고수했다. 사실 그는 1916년 재선 당시 “그가 우리를 전쟁 없이 살게 해준다’라는 슬로건으로 선거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재선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독일의 U보트가 미국 선박을 공격하면서 대중이 독일에 등을 돌리자 윌슨은 1917년 4월 2일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했다.
윌슨은 유명한 14개조 평화 원칙 연설에서 유럽제국을 해체하고 미래의 국제적 분쟁을 중재할 국제연맹의 창설 등 미국의 전쟁 목표를 설명했다.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함으로써 동맹국이 대세를 역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고, 1918년 11월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듬해 윌슨은 평화 조약에 대한 공식 협상을위해 파리로 항해하면서 유럽을 방문한 최초의 현직 대통령이 되었다. 이 조약에는 국제연맹 설립 등 14개조 평화 원칙의 일부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돌아온 월슨은 상원의 고립주의자들이 조약을 승인하도록 설득하지 못했다.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인 핸리 캐벗 로지가 이끄는 반대파는 국제연맹이 미국의 자주권을 빼앗을까봐 두려워했다.
윌슨의 말년과 역사적 평가
신체적으로 지친 윌슨은 1919년에 뇌졸중에 시달렸고 남은 임기 동안 통치가 불가능해졌다. 베르사유 조약은 비준되지 않았고 미국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윌슨은 1924년 워싱턴에서 사망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4년)는 기원전 1세기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독일 서부를 정복한 로마 장군이었다.
해적 사건과 일화
카이사르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20대에 그는 동지중해에서 해적에게 붙잡힌 적이 있다. 몸값을 내어주고 풀려나온 카이사르는 지역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 소규모 군대를 양성했고 해적의 위치를 찾아내어 모두 처형했다.
수년 후, 카이사르가 로마 정치권력의 사다리를 한참 올라가던 기원전 62년 추문 하나가 터졌다.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의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가 남성 출입이 금지된 종교 의식에 참가한 것이 밝혀졌다. 그 의식은 카이사르의 집에서 열렸기 때문에 그가 카이사르의 아내 폼페이아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이사르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직접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아내와 가족이 의심조차도 받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폼페이아와 이혼했다.
독재관 선출 배경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이 한창일 때 원로원에 의해 독재관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독재관에게 비상통치권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비상 상황은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공화정은 다시 복원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독재관의 지위에서 로마를 통치했지만 자신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원로원과 상의하고 공화정의 전통을 존중하는 모습을 유지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러나 최후를 맞이하기 몇 년 전부터 그는 점점 부주의해졌다. 아시아 속주 시민들이 그를신격화하는 것을 내버려 뒀고, 심지어 그의 얼굴이 그려진 동전이 주조되기도 했다. 살아 있는 인물이 그런 명예를 누린 예가 없을 정도였다. 동전에는 ‘종신 독재관’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렇게 불필요한 영광은 카이사르에 대한 반감을 부채질했고 결국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할 수 있다.
권력과 최후의 비극
폼페이우스가 이끌던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위협을 느꼈고, 그의 군대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명령을 거부했다. 그는 로마로 진군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카이사르의 군대가 주피터 신전까지 진격했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카이사르는 유럽까지 적을 쫓았고 결국에는 폼페이우스가 살해당한 이집트까지 갔다. 이집트를 떠나오기 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를 여왕으로 세웠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집정관이 되어 로마를 통치했다. 카이사르는 절친한 브루투스가 가담한 음모로 기원전 44년에 암살당했다.